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첼 페이지 (문단 편집) ===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 === 페이지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인종분리가 만연한 당시 미국에서는 초대 커미셔너 [[케네소 랜디스]]가 반대해 흑인이라는 이유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수 없었고, 랜디스 사후 후임 커미셔너가 된 해피 챈들러 구단주는 흑인들도 메이저리그 데뷔를 할 수 있게 적극 나섰으며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룬 이듬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호출을 받는다. 그 계약은 3개월 동안 계약금 4만 달러. 페이지 자신은 나이가 40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top%2B100%2B_50%2BSatchel%2BPaige.png|align=center]] 하지만 당시 클리블랜드 구단주 빌 빅(Bill Veeck)[* 역사상 최고의 흥행사로 꼽히는 인물. 야구 토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1/8이라는 등번호로 유명한 에디 게이델을 대타로 출장시킨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조시 깁슨]]을 영입하려고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사려고 했던 인물이다.]은 물러설 수 없었다. 40이 넘어서도 145km 이상의 강속구를 뿌릴 수 있는 실력일 뿐만 아니라, 이미 니그로 리그에서의 족적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있던 페이지는 존재 자체로 흥행 보증수표 역할도 가능했던 것. 이후 같은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니폼을 입으면서 AL 첫번째 흑인 선수로 데뷔하자, 사첼 페이지는 결국 1948년 7월 7일 42세 생일이 되는 날 클리블랜드에 입단, 메이저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 선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투수가 되었으며, 이틀 후 최고령 신인 투수 기록을 새로 세우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2차대전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40대 루키 선수는 사첼 페이지 외에 196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디오메데스 올리보]], 2009년 [[뉴욕 메츠]]의 [[다카하시 켄]]뿐이다.] 그의 첫 3경기 등판 동안 무려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야구 팬이 각 구장마다 몰려들었고, 그가 몸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박수와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오죽하면, 경찰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전성기가 한참 지나가버린 그였지만,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948년 시즌 72.2이닝 6승 1패 방어율 2.4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클리블랜드가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사첼 페이지와 [[래리 도비]]는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흑인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파일:external/www.libaseballmag.com/1952toppsbaseballcards.jpg|align=center]] 1950년 독립 리그로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1951년 다시 [[볼티모어 오리올스|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입단해 메이저리그로 복귀한다. 이것은 모두 사첼 페이지를 메이저리그로 끌어들인 빌 빅의 행보와 연결된다. 빌 빅이 떠나면서 사첼 페이지도 팀을 떠났고, 빌 빅이 세인트루이스로 복귀하면서 사첼 페이지를 부른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페이지가 브라운스를 떠난 이유도 빌 빅이 팀을 매각하고 떠났기 때문. 즉, 나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인간 관계로 팀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한 것이다. 기량은 여전하여 1952년 페이지는 45세의 나이로 12승 10패 방어율 3.07을 기록하였는데, 이 시즌에 역사상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이뤄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53년 47세의 나이로 3승 9패 3.53을 기록했는데, 이 때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1953년 시즌 종료 후 빌 빅이 브라운스를 매각하고 팀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개편되자 팀을 떠났다. 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페이지는 빌 빅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트리플A 팀 운영권을 가지게 되자 빌 빅을 따라 1955년 8월 필라델피아 산하 트리플A 팀인 마이애미 말린스[* 현재 존재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인 [[마이애미 말린스]]와는 무관한 별개의 팀이다. 말린스는 1960년 이후 몇 차례의 연고이전을 거친 후 현재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트리플A팀인 그위넷 스트라이퍼스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에 입단했다. 페이지는 1956년부터 3시즌간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후, 빌 빅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로 자리를 옮기며 팀을 떠났다. 이후 196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트리플A 팀인 포틀랜드 비버스[* 이후 연고이전과 프랜차이즈 변경을 거쳐 현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트리플A 팀인 엘패소 치와와스가 팀을 계승중이다.]에 입단하여 딱 5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다시 팀을 떠났고, 한동안 페이지의 소식은 없었다. 가끔 독립리그나 중남미리그에서 한달 혹은 석달씩 단기계약을 맺으며 마무리투수로 뛰었다는 소식 정도. 선발은 무리고, 한두이닝 정도는 전력투구가 가능하다는 모양. 남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성품인지라 50대에도 꾸준히 공을 던져왔다고 한다. 그가 떠난 뒤에도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목돈을 들고 와서 사첼에 구애를 펼치기도 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다시 올 거라는 생각은 없었던 모양. 그렇게 페이지는 은퇴한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는데...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5c2e9fabc8b345162f9254374113a7b.jpg]] || [[파일:external/30e40be60e9884a0a722a976872f79a1d83410906c1c3e866a6f5646b9ee998e.jpg]] || '''끝이 아니었다.''' 4년이 더 지난 1965년, 메이저리그 연금 규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 차이로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찰리 핀리[* 코니 맥 시절 이후 암흑기에 빠진 애슬래틱스를 인수, 이후 오클랜드로의 연고 이전을 성사시킨 후 1970년대 A's의 '''월드 시리즈 3연패'''로 대표되는 영광의 시대를 이끌어 낸 구단주다.]는 딱 한 경기를 위해 58세의 페이지를 영입하기로 한다. 페이지는 9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 전에 선발 등판하며 '''12년''' 만에 메이저리그 무대에 돌아왔고, 환갑을 바라보던 노인은 그 당시 불같던 보스턴의 타선을 '''3이닝을 28개만 던지고,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이 때 사첼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는 무려 '''33살'''이나 어렸다.] 당시 유일한 1안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 타자이자, 훗날 명예의 전당으로 가는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안타 제조기 [[칼 야스트렘스키]]가 뽑아낸 2루타였고, 최고령 루키와 최고령 선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은퇴를 하게 된다. 만약 5이닝을 던졌고, 팀이 승리했다면 '''절대 깰 수 없는''' 역대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되었을지도. 페이지는 이후 연금 규정이 더 빡빡하게 바뀌어 또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와서 공을 던지려 했지만''' 노령이라(최소 62세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커미셔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연금 지급 기준이 다시 바뀌면서 페이지가 추가등판할 없이 다시 연금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